사실, 크루얼 인텐션(Cruel Intentions)이라는 영화는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.
1999년, 청춘 영화의 전형을 완전히 뒤흔들어버린 문제작이자 명작. 고급스럽고 나른하고 위험했던 그 감정선은, 이상하게도 지금 다시 봐도 매력적입니다.
영화의 주요 무대는 뉴욕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‘명문 사립 고등학교’로 설정되어 있지만,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단순한 학교가 아니었습니다. 그것은 권력의 전시장이고, 은밀한 감정이 흘러넘치는 미로 같았습니다.
이번 여행은 바로 그 감정이 남아있는 실제 공간들, 촬영지들을 찾아 떠나는 여정입니다. 무심한 듯 거닐지만, 마음속에서는 영화의 잔상이 겹쳐지는 그 이상한 여행. 저는 그 길을 따라 걸어보았습니다.
영화 속 그 학교, 실제로는 어디일까?
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등학교. 클래식한 외관과 무게감 있는 교정, 고딕풍 건축물의 압도적인 존재감.
처음에는 세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. 그런데 실제로는 뉴욕 외곽, 티어리타운(Tarrytown)에 위치한 피스 대학교 구 캠퍼스(Pace University Former Campus)에서 촬영되었습니다.
현재는 교육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외부인의 출입은 제한되지만, 캠퍼스 외곽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영화 속 풍경이 오롯이 느껴집니다.
걷는 내내, 세바스찬과 캐서린이 흘기듯 쳐다보던 그 느낌이 떠오릅니다. 높은 나무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, 회색 석조 건물 외벽은 낡았지만 품격을 잃지 않았습니다. 그리고 그 공간이 주는 정적은, 묘하게 긴장을 주는 감정의 배경이 됩니다.
맨해튼 쪽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촬영지가 있습니다. 바로 캐서린의 저택 외관.
어퍼이스트사이드 5번가, 센트럴파크가 바로 옆에 있는 고급 타운하우스입니다. 붉은 벽돌에 철제 게이트, 과하게 꾸미지 않은 클래식한 외장. 이곳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세트처럼 보였습니다. 영화 속에서는 상류사회의 거만함과 고독이 녹아든 공간이었는데,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기품이 있습니다.
그리고 또 하나. 맨해튼 다운타운, 브루클린 하이츠, 첼시.
세바스찬의 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던 길들, 캐서린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등장하던 골목. 그런 평범한 공간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‘상징’으로 변하는지를 보게 됩니다. 거창하지 않아서 더 감정이 잘 묻어나는 장소들이죠.
촬영지 주변에서 쉬어가기 좋은 공간들
솔직히 말하자면, 이 여행은 촬영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. 영화의 ‘기분’을 온전히 체험하려면, 그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장소에서 한숨 돌려야 합니다. 그래서 저는 촬영지 근처에 있는 몇 곳의 카페와 식당들을 들렀습니다. 각각의 장소에서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.
먼저 티어리타운의 Coffee Labs Roasters. 작고 소박한 카페입니다. 그런데 이상하게도 들어서는 순간, 세바스찬이 테이블 끝에 앉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.
나무 테이블, 무심한 조명, 바리스타의 굵은 목소리. 브런치로 나오는 오픈 샌드위치와 라떼 한 잔이 이 공간을 완성시켜 줍니다.
뉴욕 시내로 들어오면, Café Sabarsky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. 뇌외갤러리 안에 위치한 이 오스트리아풍 카페는 분위기만으로도 영화 한 편을 찍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합니다.
우아한 벨벳 의자에 앉아 사과 슈트루델을 한입 베어 물면, 고급스럽고 쓸쓸한 크루얼 인텐션의 기류가 입 안에 맴돕니다. 창밖에는 센트럴파크가 있고, 안에는 진중한 대화와 클래식 음악이 흐릅니다. 여긴 정말 캐서린이 단골이었을 법한 공간입니다.
브루클린 덤보 지역의 카페들도 좋습니다. ‘Butler’ 같은 곳은 좀 더 현대적이지만, 영화의 리메이크판이 나온다면 여기서 촬영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좋습니다.
벽돌 벽, 빈티지 러그, 디저트 쇼케이스. 크루얼 인텐션의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.
숙소 선택, 그리고 그 분위기를 지켜내는 법
이 영화는 감정이 무너질 듯 고요한 공간에서 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. 그래서 숙소 선택도 굉장히 중요합니다. 아무 호텔에서 자면 안 됩니다. 방에 들어섰을 때 캐서린이 앉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어야 합니다. 리즈가 침대 모서리에 앉아, 조용히 무언가를 읽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.
Tarrytown House Estate on the Hudson은 그런 조건을 충족합니다.
돌로 된 벽, 나무 계단, 넓은 정원. 낮에는 새소리만 들리고, 밤에는 작은 촛불처럼 창문 불빛만 보입니다. 그곳에 앉아 있으면, 크루얼 인텐션이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공간으로 확장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.
The Marlton Hotel은 조금 더 도심적인 감성입니다. 클래식한 로비, 고풍스러운 벽난로, 레트로 느낌의 조명. 세련되면서도 빈티지한 매력이 있고, 그리니치 빌리지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와도 잘 어울립니다.
The Lowell Hotel은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입니다. 촬영지와 가장 가까우며, 내부는 고급스러우면서도 따뜻합니다. 하얀 침구, 두꺼운 커튼, 조용한 복도. 이런 호텔에서는 굳이 뭘 하지 않아도 하루가 영화처럼 흘러갑니다.
예산은 다소 유동적입니다.
숙소는 1박 기준 $250~$500, 식비는 하루 $70~$100, 교통비와 입장료는 약 $40 내외입니다.
크루얼 인텐션이라는 영화의 무드를 따라간다는 점에서,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습니다. 그리고 확실히 이 비용이 여행의 깊이를 만들어 줍니다.
교통은 맨해튼 중심에서 Tarrytown까지 메트로노스 기차로 약 45분, 지하철과 메트로카드 7일권($34)을 활용하면 도심 이동도 효율적입니다.
결론: 당신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
어떤 여행은 기억보다 감정으로 남습니다. 크루얼 인텐션을 따라간 이번 여행이 그랬습니다.
나는 단지 장소를 옮겨 다녔을 뿐인데, 그 장면들이 다시 내 안에서 재생되었고, 익숙한 얼굴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. 촬영지에 앉아 있을 때, 카페에 들어섰을 때, 호텔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그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가 생각났습니다.
이런 감정이 있는 여행은 흔치 않습니다. 그래서 추천하고 싶습니다.
지금, 당신이 그 이야기를 다시 걷고 싶다면. 크루얼 인텐션이라는 기억을, 직접 체험해 보세요.